요가 학파와 상키야 학파
** 요가수뜨라의 개요
Yoga Sūtra(A.D. 4세기)는 몇 세기에 걸쳐 발전해온 사상의 단편들을 모아서 편집한 것이다. 이것의 저자로 알려진 Patañjali는 실상 편집자에 불과하다. Yoga Sūtra는 한 학파의 소의 경전으로서 나름의 일관된 체계를 지닌다.
Yogaś citta-vṛtti-nirodhaḥ //1-2
요가란 마음작용의 억제이다.
Tadā draṣṭuḥ svarūpe' vasthānam //1-3
보는 자는 그때 자신의 본성에 머문다.
Vṛtti-sārūpyam itarta // 1-4
그 밖의 경우에는 [보는 자가] 마음작용과 같은 모습을 지닌다.
Vṛttayaḥ pancatayaḥ kliṣṭākliṣṭāḥ // 1-5
마음작용은 다섯 가지로 물든 것과 물들지 않은 것이다.
Pramāṇa-viparyaya-vikalpa-nidrā-smṛtayaḥ //1-6
[마음작용이란] 바른 지식, 그릇된 지식, 분별, 수면, 기억이다.
Abhyāsa-vairāgyābhyāṃ tannirodhaḥ // 1-12
실천수행과 욕망의 포기에 의해 그 [마음작용이] 억제된다.
Nirvicāra-vaiśāradye' dhyātma-prasādaḥ //1-47
미세한 생각의 경험마저 없을 때 자신의 내부에 청정함이 있다.
Ṛtaṃbharā tatra prajñā // 1-48
거기에는 진리를 간직한 지혜가 있다.
Tajjaḥ saṁskāro' anya-saṁskāra-pratibandhī // 1-50
그것에서 생긴 잠재력은 다른 잠재력을 방해한다.
이상의 내용은 Yoga Sūtra 1장에 기술된 것으로, 이 문헌 전체에 나타나는 요가의 체계를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 상키야의 형이상학
상키야에서는 불교와 같이 세계를 苦로 보며, 이 고를 극복하는 데에 철학적 사유의 주목적을 둔다. 또한 세계관에 있어서도 불교와 같이 요가의 체험에 기초한 심리학적인 세계관, 즉 인간의 심리현상에 대한 관찰을 중심으로 세계를 파악하려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상키야에서는 불교에서 인정하지 않는 영원한 자아, 즉 puruṣa(정신)라는 실재를 인정한다. 또한 세계의 존재 원리를 이 puruṣa와 prakṛti(물질)라는 두 개의 형이상학적 원리로써 설명한다는 점에서 불교와 결정적으로 다르다.
prakṛti(물질)이라는 개념은 상키야의 형이상학에서 특수한 의미를 지닌다. prakṛti는 puruṣa를 제외한 일체의 현상이 그로부터 발전되어 나오는 모태와 같은 것이다. 현상적 존재가 전개되기 이전의 prakṛti는 avyakta(未顯現)라고 부르는데, 한계를 가진 경험 세계가 분명한 모습으로 나타나기 이전의 가능성의 세계를 의미한다.
prakṛti는 모든 것이 발전하여 나오는 질료적 원인(upādāna-kāraṇa)으로서 무한한 창조적 힘(śakti)을 지닌다. 상키야 철학에 의하면 무에서 유가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결과도 원인 안에 이미 내재해 있으며, 결과란 그와 같이 잠재적으로 내재하고 있던 원인이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상키야에 따르면 세계는 끊임 없이 해체와 진화의 과정을 거친다. 진화란 prakṛti로부터 일체의 현상이 순차적으로 발전되어 나오는 과정을 의미하며, 해체란 만물이 prakṛti의 미현현 상태로 되돌아 가는 것을 의미한다.
상키야에 따르면 prakṛti는 sattva(지성, 순수성), rajas(운동성, 격정성), tamas(둔중성)라는 세 가지 속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미현현 상태에서 균형을 이루며 존재하다가, 어떤 특정한 요소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지게 되면서 점점 더 분명한 한계와 형태를 가진 현상세계의 존재로 전변하게 된다.
prakṛti의 평형상태가 붕괴하고 현상세계가 유출되는 이유에 대해 상키야에서는 puruṣa의 존재를 그 이유로 든다. 즉 prakṛti는 puruṣa의 향수(bhoga)와 해방(apavarga)을 위한 목적적 성향을 지니며, 마치 철이 자석에 이끌리는 성질을 지니듯이 puruṣa를 위해 봉사하는 성향을 지닌다.
puruṣa와의 접촉으로 인해 prakṛti는 내적인 평형상태를 잃는다. 그때 제일 먼저 rajas가 흔들리고, 이 라자스의 동요로 인해 sattva와 tamas가 뒤따라 움직여 세계의 진화가 시작된다.
이렇게 해서 제일 먼저 특정한 성격을 갖고 나타나는 것은 sattva를 지배적 성품으로 하는 지성(buddhi)이다. 이 붓디는 우주론적으로 그로부터 다른 모든 것들이 생성되어 나오는 까닭에 ‘위대한 것’ 즉 mahat라고도 부른다. 이 붓디들은 그 속에 우주가 해체될 때 prakṛti 속으로 잠재해버린 개인적인 성향(saṃskāra)를 지닌다.
이 붓디는 뿌루사의 빛이 있을 때만 다른 물건들을 비추어 보는 능력을 지니며, 이로부터 일상적인 정신활동, 인식, 경험 등이 가능하게 된다. 붓디는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사물의 형상에 따라 스스로 변화하면서 prakṛti와 puruṣa를 잇는 중개 역할을 한다.
한편 세계의 전개가 더욱 구체화되면서 buddhi(知性)로부터 ahaṁkāra(自意識)라고 부르는 개체적 원리가 생겨나고, 그것으로부터 manas(意根)와 jñāna-indrya(五知根) 및 karma indrya(五作根)가 산출된다. 이렇게 해서 ahaṁkāra로부터 11개의 근에 이르는 내적인 전개가 완료된다.
또한 외적인 전개는 tamas의 성질이 지배적인 ahaṁkāra로부터 시작된다. 소리․감촉․모양․맛․냄새의 본질을 이루는 미세한 물질로서 tanmātra(五唯)와, 다시 이것의 배합에 의해 산출되는 허공․바람․불․물․흙이라는 bhūta(五大)가 그것이다. 이렇게 해서 ahaṁkāra로부터 10가지 외적인 현상의 전개가 완료된다.
puruṣa
↕ ↖
↕ ↘
prakṛti → buddhi → ahaṁkāra → → → → → manas
↓ ↘ → jñāna-indrya
↓ ↘ → karma indrya
→ → → tanmātra
↘ → bhūta
이상과 같은 prakṛti의 전개는 puruṣa와 접촉(saṁyoga)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puruṣa는 순수한 의식으로서 언제나 자유로우며 prakṛti의 방관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puruṣa는 buddhi가 겪는 마음의 상태들을 스스로 체험하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바로 이것을 無知(avidyā)라고 부르며 현상세계의 고통은 바로 이것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상키야 철학에 있어서 속박이란 puruṣa와 buddhi를 구분하지 못하고 혼동하는 무지를 말한다. 결국 해탈이란 puruṣa와 buddhi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識別知(viveka-jñāna)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buddhi를 중심으로 한 인식과 행위가 의미를 잃게 되면 puruṣa는 본래의 모습인 독존(kaivalya) 상태에 머무는데, 이것이 곧 상키야 철학에서 말하는 해탈이다.
이상과 같은 상키야의 형이상학에서 볼 때, 해탈과 속박은 모두 prakṛti의 자체 내의 사건이며 buddhi가 그 관건을 쥔다. 왜냐하면 puruṣa는 본래 청정한 순수 의식으로서 해탈과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할 때 상키야의 형이상학은 물질적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성을 자각하기 위한 실천적 구도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다른 정신과 물질이 왜 최초의 접촉을 시작하였는가의 문제에 있어서 그 취약점이 발견된다.
** 자재신의 존재와 역할
상키야 학파와 요가 학파 모두는 prakṛti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일정한 질서와 합목적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원래 지성을 갖고 있지 않은 맹목적인 prakṛti가 어떻게 해서 그러한 질서와 조화를 갖는가 하는 점에서 관점을 달리한다.
상키야는 prakṛti 자체가 puruṣa에게 봉사하려는 목적적 경향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 전개 과정에 있어서 아무런 외부적 힘의 작용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요가 철학은 prakṛti에 지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스스로 그런 목적성을 가질 수 없으며, 전개의 과정에서 業에 합당한 과보를 받도록 인도하는 것은 prakṛti만으로는 설명이 안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요가 철학에서는 전지전능한 자재신 Īśvara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 자재신의 영원한 의지에 따라서 prakṛti의 전개 과정은 인도되며 puruṣa의 이익이 보호되고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요가에서 인정하는 이 자재신은 인격신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이 자재신의 인정 여부에 따라서 상키야를 무신적 상키야(nirīśvara-sāṁkhya)라고 하며, 요가를 유신적 상키야(seśvara-sāṁkhya)라고도 부른다. Yoga Sūtra에서 이 신은 영원히 속박을 모르는 puruṣa로서 수행자들의 명상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러나 주석서에 이르러 비활동적인 신의 개념에서 벗어나 인격적 자재신으로서 위상을 지니게 된다.
Īśvara-praṇidhānad va // 1-23
또한 자재신에 의해서도 [삼매를 얻을 수 있다.]
Kleśa-karma-vipākāśayair aparāmṛṣṭaḥ puruṣaviśesa īśvaraḥ // 1-24
자재신은 번뇌․업․업보․잠재력에 의해서 영향을 받지않는 특수한 뿌루사이다.
Tatra niratiśayaṁ sarvajñabījam // 1-25
거기에는 모든 것을 아는 최고의 지혜의 씨앗이 있다.
Pūrveṣāmapi guruḥ kālenānavacchedāt //1-26
[그 자재신은] 시간에 의해서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태초의 이들에게도 스승이다.
Tasya vācakaḥ praṇavaḥ // 1-27
그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소리가 있다.
Tajjapas tadarthabhāvanaḥ //1-28
그를 반복하여 외우고 그의 의미를 명상하라.
이러한 자재신은 언뜻 보면 전지전능한 유일신처럼 보이지만, 그의 초능력은 세계를 창조하거나 파괴하는 능력이 아니다. 또한 모든 것을 아는 지혜의 씨앗(sarvajñabīja)도 전지한 능력이 아니라 그럴 가능성의 씨앗을 의미할 뿐이다.
이러한 자재신은 Yoga Bhāśya에 이르러, 자비심에 의해 “지혜와 바른 삶을 가르쳐 괴멸과 대 파괴가 있을 때 윤회하는 인간들을 구원할 것이다(1-25)”고 결심하는 인격신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요가의 수행체계나 형이상학에서 자재신이 반드시 요구되는 존재가 아니다. 형이상학적으로 현실의 苦는 뿌루사의 향수 대상이므로 자재신의 간섭이 불필요하다. 그의 자비가 없어도 puruṣa는 본래 청정하며 세계의 창조․유지․파괴는 prakṛti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재신을 요가가 받아들인 이유로는 요가 수행의 보편화를 위한 방편이 필요했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인정된다. 즉 일반인이 받아들이기 쉬운 당시의 유신론적인 사상을 유가 수행의 일부로 채택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견해이다.
고전요가에서 자재신의 역할은 삼매를 성취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명상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인격신에 대한 헌신은 집중한다는 의식이 없이 집중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의 하나이다. 따라서 자재신에 대한 명상은 종교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에게 권장할 만한 방법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요가의 형이상학적 체계 내에서 자재신은 참된 지혜(prajñā)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것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prakṛti와 puruṣa의 이원론적 입장을 고수하는 한 참된 지혜란 이들 양자를 구분하는 식별지(viveka-jñāna)일 수밖에 없다.
** 요가와 상키야의 관계
Sāṇkhya 학파와 Yoga 학파는 이론과 실천이라는 측면에서 상호 보완적인 입장을 갖는다. 또한 양자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형이상학적 배경을 지닌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와 관련하여 Bhagavad-Gītā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sāṁkhyayogau pṛthak bālāḥ pravadanti na paṇḍitāḥ /
ekam apy āsthitaḥ samyag ubhayor vindate phalam //5-4//
어리석은 자들은 상키야와 요가를 다르게 말하지만, 학식이 있는 자들은 그렇지 않다.
하나라도 바르게 전념한 자는 둘의 결과를 얻는다.
yat sāṁkhyaiḥ prāpyate sthānaṁ tad yogair api gamyate /
ekaṁ sāṁkhyaṁ ca yogaṁ ca yaḥ paśyati sa paśyati //5-5//
상키야에 의해 얻어지는 경지는 요가에 의해서도 도달된다.
상키야와 요가를 하나로 본다면 [그것은 바르게] 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Yoga는 Sāṁkhya의 형이상학에 바탕을 둔 실천철학으로 인정받아 왔다. 상키야는 이론적인 측면에 주력한 반면에 요가는 실천적인 측면에 주력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 차이점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Mahābhārata(12. 289. 7)에서도 “상키야는 성전에 의존하는데 반해 요가는 직접적인 경험에 의존한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고전요가의 형이상학은 상키야 학파의 소의 경전인 Sāṃkya-kārikā를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은 듯하다. 두 학파의 밀접한 관계를 고려한다면 당연히 Yoga Sūtra와 Sāṃkya-kārikā의 형이상학은 같아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Yoga Sūtra나 Yoga Bhāśya에는 Sāṃkya-kārikā나 그 주석서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또한 Yoga Sūtra에는 상키야에서 말하는 ‘자아의식(ahaṅkāra)’이라는 술어가 나타나지 않으며 ‘지성(buddhi)’ 또한 후대에 추가된 대목에서만 몇 번 등장할 뿐이다. 더불어 ‘의식(manas)’이라는 개념도 Yoga Sūtra의 그것과 다르게 설명된다. Yoga Sūtra에서는 citta라는 술어로써 이들 3가지를 대치한다.
한편 14세기 경에 저술된 Sāyaṇa Mādhava의 Sarvadarśanasaṃgraha에서도 요가를 ‘유신적 상키야(Seśvarasāṁkhya)’라고 부른다. 상키야와 요가는 자재신을 인정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점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 형이상학적 난점과 수행의 필요성
일반적으로 형이상학은 초감각적 세계를 순수한 사고에 의해 인식하려고 하는 특징을 지닌다. 따라서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논리적 난점(aporia)을 지니는 것이 보통이다. 상키야와 요가의 형이상학 또한 마찬가지인데 일반적으로 지적되는 문제점을 정리하면 같다.
⑴ puruṣa는 본래 독존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prakṛti의 pariṇāma와 그것에 대한 bhoga 그리고 그것으로부터의 mokṣa와 apavarga가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⑵ prakṛti에는 정신성이 없다. 따라서 puruṣa의 bhoga와 apavarga를 위해 아무런 목적의식을 가질 수 없다. 또한 만약에 puruṣa의 bhoga가 가능하다면, 초월적 정신성으로서의 puruṣa가 경험 영역 안에 한정되는 결과가 초래되고 만다.
⑶ puruṣa와 prakṛti는 본래적으로 영원한 실재이다. 따라서 이들 양자의 saṁyoga는 항상 그 가능성이 열려 있다. 따라서 세계는 창조와 소멸을 일정한 주기에 따라 되풀이 할 필요가 없다. 또한 puruṣa의 독존이 성취되었다고 하더라도 재결합의 가능성은 항존한다.
⑷ puruṣa는 3가지 guṇa와 본질적으로 반대되는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여럿이라고 할 수 없다. 만약에 여럿이라면 최초로 전변의 기회를 만든 puruṣa와 그렇지 않은 puruṣa간의 차별이 발생한다.
이러한 형이상학적 난점을 회피하기 위해서 요가브하샤(2-23)에서는 “지견은 해탈의 원인이 아니다(na darśanaṁ mokṣakāraṇam)”고 하였고, 또한 요가수뜨라(2-26)에서도 “동요 없는 식별지가 [무지의] 제거를 위한 수단(viveka-khyātir aviplavā hāna-upāyaḥ)”이라고 언급하였다.
이러한 동요 없는 식별지(viveka-khyātir aviplavā)에 관련한 Yoga Sūtra와 Yoga Bhāśya의 전형적인 언급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Yoga-aṅga-anuṣṭānāda śuddhi-kṣaye jñāna-dīptir-ā-vivekakhyāteḥ // YS. 2-28 //
요가의 단계적 실천으로 인하여 부정한 것이 소멸될 때 바른 지혜의 빛인 식별지[에 도달한다].
.... mithyā-jñānānasya dagdha-vīja-bhāva-upagamaḥ punaś-ca-aprasavaḥ ity-eṣa mokṣasya mārgo hānasya-upāya iti //YB. 2-26//
.... 이것(식별의 지혜)은 삿된 지식에 속한 존재로 나아가는 씨앗이 타버린 것으로, 다시는 싹트지 않는 것이다. [또한 이것은] 해탈로 나아가는 길이고 단멸을 위한 수단이다.
** 요가 수행의 단계
요가의 체계에 따르면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대한 지견(darśana)은 해탈의 원인이 아니다. 또한 식별지는 바른 지식이 증가함으로써 생기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마음작용이 소멸할 때 일어나는 초이성적인 것이다. 이러한 식별지를 얻기 위해서는 고유의 실천 행법이 필요하다.
puruṣa는 현상적 자아의식이 완전히 사라질 때 비로소 인식된다. 즉 마음의 기능을 억제하는 것으로부터 이것의 인식이 가능하다. 요가수뜨라(1-12)에서는 이것을 위한 방법으로서 다음과 같은 2가지를 제시한다. “실천수행과 욕망의 포기에 의해 그 [마음작용이] 억제된다(abhyāsa-vairāgyābhyāṃ tannirodhaḥ)”.
실천수행(abhyāsa)은 마음의 작용을 정지시키기 위한 명상수행을 의미하고, 욕망의 포기(vairāgyābhya)는 대상에 대해 집착하지 않도록 자기를 통제하는 윤리적 실천을 가리킨다.
tatra sthitau yantno' bhyāsaḥ //YS. 1-13//
거기에서 실천수행이란 [마음작용을] 정지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sa tu dīrgha-kāla-nairantarya-satkāra-āsevito dṛdha-bhūmiḥ //YS. 1-14//
그런데 이것은 오랜 동안 쉬지 않고 정성스럽게 익힌 자만이 확고한 경지에 이른다.
dṛṣṭa-ānuśravika-viṣaya-vitṛṣnasya vaśīkāra-saṁñjā vairāgyam //YS. 1-15//
욕망의 포기란 보여지거나 전해들은 대상에 대해 무관심한 자의 통제 의식이다.
tat-paraṁ puruṣa-khyāter guṇa-vaitṛṣṇyam //YS. 1-16//
최고의 [욕망의 포기는] 뿌루샤에 대한 지혜를 얻어 근본속성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다.
그러나 실천수행과 욕망의 포기는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집중 등에 의해서 마음작용이 하나의 대상에 머물면 다른 대상에 대한 욕망은 자연히 억제되기 때문이다. 또한 외부대상에 대한 욕망을 억제하면 마음작용은 내부대상으로 자연히 집중된다.
수행의 입문단계에서는 세속적인 욕망이 수행을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로막는다. 따라서 낮은 단계의 욕망부터 포기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명상에 적합한 육체를 만드는 수행을 하며, 욕망의 직접적인 근원인 감각기관을 통제하고, 마지막으로 마음작용을 억제하는 수행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수행 과정이 Yoga Sūtra의 2장 29절에서부터 2장 55절까지에 걸쳐 기술되는 8지칙(aṣtānga)이다. 이들은 구체적으로 금계(禁戒, yama)권계(勸戒, niyama)좌법(坐法, āsana)조식(調息, prāṇāyāma)제감(制感, pratyāhāra)응념(凝念, dhāraṇā)정려(靜慮, dhyāna)삼매(三昧, samādhi)이다.
이들 중에서 yama는 다시 ahiṁsā(2-35)․satya(2-36)․asteya(2-37)․brahmacarya(2-38)․aparigraha(2-39)를 세부적인 내용으로 하며, niyama는 śauca(2-40)․saṁtoṣa(2-42)․tapas(2-43)․svādhyāya(2-44)․īśvara-praṇidhāna(2-45) 등으로 구성된다. 이들은 예비적 수행으로서 요가의 윤리적 수행 단계에 해당된다.
한편 āsana(2-46, 47, 48)prāṇāyāma(2-49, 50, 51, 52, 53)pratyāhāra(2-54, 55) 등은 육체적 수련단계에 해당되고, saṁyama(3-4)라고 부르는 dhāraṇā(3-1)dhyāna(3-2)samādhi(3-3) 등은 본격적인 심리적 수행으로 배대된다.
이상의 내용은 요가 수행이 점진적인 향상의 체계로 이루어져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요가수행의 점진적 성격과 관련하여 Yoga Sūtra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taj-jayāt prajñā-ālokaḥ //YS. 3-5//
그것(saṁyama)을 닦음으로써 지혜의 빛이 있게된다.
tasya bhūmiṣu viniyogaḥ //YS. 3-6//
그것은 단계에 따라서 적용되어야 한다.
trayam anter-aṅgaṁ pūrvebhyaḥ //YS. 3-7//
이 셋(saṁyama)은 앞의 것 [다섯 가지 것]보다 내적인 지칙에 해당된다.
tad api bahir-aṅgaṁ nirbījasya //YS. 3-8//
[그러나] 이것도 역시 무종자 삼매에 대해서는 외적인 지칙에 불과하다.
그러나 Vivekānanda(1863-1902)라든가 Aurobindo Ghosh(1872-1950) 등에 따르면 이들 모두는 Rāja-yoga의 범위에 포함된다. 또한 이들의 분류법에 따를 경우, aṣṭāṅga 중에서 yamaniyamaāsanaprāṇayāma는 Kriyā-Yoga․Mantra-Yoga․Haṭha-Yoga․Kundalini-Yoga․Śakti-Yoga에 해당되며, dhārānadhyānasamādhi는 Dhyāna-Yoga․Buddhi-Yoga․Laya-Yoga․Yantra-Yoga․Samadhi-Yoga를 포함하게 된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요가 수트라의 수행체계는 심리적 수행 단계의 토대 위에서 이지적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구조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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