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살로메의 명상노트

우리집 개 샨티도 깨닫는 것을...

파르헤지아 2009. 1. 5. 20:00

오늘 오후까지 나의 일상은 엉망진창이였다.

거기에 기르던 개인 샨티마저도 제멋대로다.

함께 산다는 것은 많은 양보와 배려가 필요하다.

동물은 인간에게 전부를 기대어 생존하기 때문에 가끔 개밥을 챙기면서 나는 곧잘

내가 지금 이 개를 챙기고 보살피듯이 남자를 챙기면 잘 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처음부터 샨티는 묶여 있는 것 보다는 돌아다니는 야성이 엿보이던

놈인지라 개줄에 묶여 지내게 하기가 쉽지 않았다.

지난 여름의 끝자락 그가 처음 우리 집에 오자마자 개줄을 풀었다.

샨티가 뛰쳐나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그의 무례함과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세상에 저렇게 길들여지지도 않고 제멋대로인 사람도 있다는 사실 앞에 나는 거의 기가 막혀 있었다.

 

그가 떠나자마자 나는 나의 평온한 일상을 다시 찾으며 얼마나 긴 안도의 숨을 내쉬었는지 모른다.

그동안 메여있는 것에 길들여 졌던 샨티는 그를 만나고 다시 야성을 드러냈다.

강아지때 사준 개줄이 작아져 큰 줄로 바꾸어 주자마자 녀석은 어떻게든 개줄을 풀기 위해 골몰했다.

지능이 낮은 개도 한가지 목표가 설정되자 그것에 몰입하고 결국은 개줄을 물어뜯고 탈출을 하며

나를 비웃듯이 내 주위를 서성거리며 약을 올리곤 했다.

하지만 자신이 개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샨티는 지치거나 배가 고프면  곧 집으로 돌아왔다.

다행인 것은 녀석이 큰탈 없이 집으로 무사히 돌아 온다는 것이다.

 

개는 자신을 때리거나 사랑한 사람을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한다.

샨티는 자신에게 자유를 준 그를 잊지 못했다.

그가 인사도 없이 떠나도 다른 사람이 집에 왔다가 갈때는 한번도 내지 않던 신음소리로

이별을 거부하는 의사를 표시했다.

그는 처음 샨티를 보고 개줄에묶여 있다는 그 답답함 하나만을 생각하고 개줄을 풀었듯이,

개가 자신을 좋아하고 이별을 하는 순간 느끼는 상실의 고통에 대해서는 무감각 했다.

떠나는 자는 남는 자의 고통을 알수 없기에 기다림은 언제나 남는 자의 고통과 슬픔의 몫이다.

대부분의 배려가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이 이끄는 대로 살며 언제나 타인을 상처준다.

 

나인들 개줄에 묶여 자유를 상실한 개를 보며 즐거울 리는 없다.

그러나 내가 내 삶의 굴레를 받아듯였듯이 개 역시 개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편하지 않을까?

샨티는 내가 집에만 있으면 언제나 집앞에 쪼그리고 앉아 햇빛을 쬐며 조용히 있는다.

그러나 내가 집을 나가기만 하면 언제나 애처로운 신음소리로 가지 말것을 표현한다.

그래도 이별을 해야만 한다는 것을 나는 얘기한다.

'엄마가 올 때까지 집 잘보고 있어 샨티, 곧 올거야' 라고

개가 인간의 말을 알아듣던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샨티가 나에게 온 순간부터 나는 샨티의 엄마이고 죽는 순간까지 그건 변함이 없으며

우리 둘 사이엔 사랑의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지난 토요일 공주의 도학서원에 갔다 저녁 10시쯤 집에 도착하자 작은 개목걸이가 불쌍해서 바꿔준

큰 목걸이를 물어뜯고 길을 활보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나의 오만에 상처를 준 샨티에 대해 감성이 아닌 이성이 작동했다.

자기 분수도 모르고 계속 개줄을 끊고 달아나는 멍청한 개애 대해 이제는 버릇을 고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자신을 책임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조금 달래다가 내버려 두었다.

이미 녀석도 몇 번이나 도망을 치면서 내가 어떻게 자신을 개줄에 자신을 묶는지를 알기 때문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내 주위를 맴돌았다.

영악하기가 개나 사람이나 매한가지다.

그래서 나도 좀 더 수준 높은 방법을 쓰기로 했다.  녀석에게 선택권을 주기로 한 것이다.

그때부터 개밥도 물도 주지 않았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의 먹이는 스스로 찾아야 하는 자연성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였다.

그 순간 샨티에게 권력을 가지고 이를 사용하는 권력의 속성과 권력을 가진 나의 속성을 본다.

내게 개에 대한 생사의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에 묘한 쾌감도 든다.

예상대로 열심히 돌아다니면 녀석은 다음날 12시가 되기 전에 내게 항복했다.

어찌 보면 판단력이 빠른 놈이고 어찌 보면 약은 놈이다.

그래도 한 시간 정도 거실앞 창가에 쪼그리고 있는 샨티를 무시했다.

녀석의 속을 더 태워서 더 이상 내게 대항하여 도망치거나 놀릴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개목걸이를 들고 나가자 개밥그릇이 있는 개줄 앞에 스스로 다가와 기꺼이 개줄에 묶인다.

이제 내가 주인임을 알고 굴복하는 놈에게 주인다운 아량을 베풀어 사료 위에 빵도 하나 더 준다.

이제 샨티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자유보다는 배고픔이 더 절실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므로...

 

녀석이 내게도 하나의 깨달음을 준다.

개가 내게 스스로 굴복하듯이 나 역시 문명에 길들여 지고 국가라는 커다란 권력 앞에 이미 길들여져서

굴종하고 산다는 것을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불행한 건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문명에 길들여지며 편안함과 안락함 속에서 자연성과 순수성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불행으로 시작하여 절망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을 받아들여서 그 안에서 스스로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을 택한 순간 내게 삶은 더 이상 짐이나 고통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일상의 반복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