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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禪)과 성(性) & 탄트라

파르헤지아 2006. 3. 27. 22:20

선(禪)과 성(性) & 탄트라

 

Q. 선(禪)은 성(性)에 대해 어떤 식으로 접근합니까?

선객(禪客)들은 중성(中性)적인 분위기 또는 무성(無性)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 같습니다.

 

A. 禪은 性에 대해 아무 태도도 갖지 않는다. 그것이 禪의 아름다움이다.

특정한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여전히 거기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어떤 사람은 섹스에 반대한다. 그것이 그의 태도이다.

또 어떤 사람은 섹스에 찬성 한다. 그것이 그의 태도이다. 찬성과 반대는 두 바퀴처럼 함께 굴러간다.

그들은 적이 아 니다. 그들은 똑같은 일에 종사하는 동업자이며 친구이다.

禪은 섹스에 대해 아무 태도도 내세우지 않는다.

왜 꼭 섹스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한단 말인가?

禪은 철저하게 자연스럽다. 그것이 禪의 아름다움이다.

그대는 마시는 물 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는가?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해 특정한 태도를 갖는가?

밤에 잠자 는 것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갖는가? 아무 태도도 없다. 禪은 매우 소박하고 단순하다.

그대는 어떤 것에 대해서 특정한 태도를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일단 태도를 가지면 그대 의 순진무구함이 파괴되고, 그 태도들이 그대를 조종하기 시작한다.

禪은 어떤 것에 대 해서 찬성이나 반대를 표방하지 않는다.

禪은 '평범한 것은 무엇이든지 좋다.' 고 말한다.

평범해진다는 것,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된다는 것, 아무 이념도 없고 특성도 없이 그저 無가 되는 것......

어떤 특별한 품성(character)을 지닐 때, 그대는 일종의 신경증에 걸린 것이다.

품성이 란 그대 안에 무엇인가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품성은 그대의 과거를 의미한다.

품성은 과거를 의미한다. 일정한 틀을 갖도록 세뇌되고 교육받았다는 것이 품성의 의미 이다.

품성을 가질 때 그대는 그 안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댄 더 이상 자유롭지 못하다.

진정한 인간은 아무 품성도 갖지 않을 것이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그는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다.

그는 순간에 대응하여 즉흥적 으로 행동할 것이다. 그는 무엇을 할 것인지 알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돌이켜 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상황이 발생했는데 그대는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있다.

그때에 그대는 일 정한 품성의 틀에 갇힌 것이다.

그대는 과거에 대고 '내가 무엇을 해야 하지?' 하고 묻고 있다.

아무 품성도 갖지 않을 때, 그대는 다만 눈 앞에 상황을 들여다 본다.

그러면 무엇 을 해야 하는지 상황이 스스로 결정한다. 그때에 그것은 자발적이고 즉흥적인 행동이다.

그것은 즉각적인 대응이지 기계적인 반사가 아니다.

禪에는 아무런 신념 체계도 없다. 性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禪은 性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그렇게 되어야 한다.

탄트라(Tantra)는 性에 대해 특정한 태도를 갖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에 의해 저질러진 폐해를 시정하려 하 는 것이다.

균형을 회복하도록 그대를 돕는 구제책으로 탄트라가 등장하는 것이다. 그대는 왼쪽으로 너무 기울어 있다. 그래서 탄트라는 그대가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이게 끔 도움을 주는 방편으로 온다.

탄트라는 상실된 균형을 바로잡는 교정의 방편이다. 그래서 지나칠 정도로 性을 강조하는 것이다.

소위 종교라는 것들은 性을 죄악이라고 말 하는데 반해 탄트라는 性이야말로 유일무이하게 신성한 것이라고 말한다. 탄트라는 잘 못된 것을 바로 잡는 치료제이다.

 

그러나 禪은 치료제가 아니다. 질병이 완전히 사라졌 을 때의 상태가 禪이다. 물론, 질병이 있을 때는 치료제가 필요하다.

그러나 일단 병이 낫고 나면 주사기와 약병 에 집착하지 말라. 그것들을 내던져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려라. 일반적은 사회는 性에 반대한다. 그래서 인류에게 性을 되돌려주기 위한 방편으로 탄트 라가 등장한다.

그리고 性이 되돌려지면 그때에 禪이 떠오른다. 禪은 아무 태도도 없다. 禪은 완전무결하게 건강하다.

 

- 오쇼 라즈니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