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군 이포리 마을에 산지도 2년이 넘어가건만 이포대교 맞은편에 있는 파사성에는
아직 한번도 오르지 못했다.
오후 네시가 넘어 집에서 이포대교까지는 자동차로 이동하고 천서리 마을입구에서 부터
걸어서 파사성 정상에 올랐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이 산성의 나이 거진 2000살이 되어가니 세월의 무상함과 함께
여러 나라의 흥망성쇠가 성곽의 돌무더기처럼 흔적으로만 잔재해 있다.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에게도 말걸지 않는 파사성에서 바로 본 여주와 양평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그래서 사람은 높은 곳에서 넓게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포대교 너머 내가 사는 마을이 작은 그림으로 펼쳐져 있는 모습에
또 한번 그래서 사람이 산을 오르는 것이구나 라는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시간이 내어 자주 찾아야 겠다는 생각이 드는 완만한 산성의 길이 좋다.
복원이 아직 다 이루어지지 않아 사람의 인적이 없어 더 고즈넉하고 좋았다.
진달래가 곳곳에 분홍빛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었다.
허물어져 쌓여있는 돌들이 폐허처럼 뒹글고 있다.
아직까지 복원이 완성되비 못한채 파사성은 말 그대로 이렇게 부셔진 돌무더기들로 쓸쓸하다.
삼국시대 신라 파사왕때 건립된 산성을 조선 임진왜란때 다시 복원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포나루터는 한강 이남 지방의 모든 특산물이 이곳에서 한번 정박을 한 후에
마포나루터로 갈수 있었던 매우 중요한 물길의 요충지였다.
50년 전만 해도 이포나루터는 상인들로 인해 매우 번성했던 곳이라고 하지만
지금은 그저 금싸라기참외가 나는 금사면의 한 마을로 남았다.
사람에게도 생로병사와 길흉화복이 하나의 사이클처럼 순환하듯이
땅도 마을도 모두 그렇게 흥망성쇠의 순환의 사슬에 묶여 간다.
태어나거나 만들어지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의지라고 생각하는 힘으로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그렇게 되어지는 것이 더 큰것처럼 느껴진다.
2009년 4월 1일의 나의 하루가 파사성에서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무수한 이야기를 간직한 채로 아직도 파사성은 이렇게 잠들어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발을 디디고 살았을까?
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삶의 허무같은 파사성의 저 돌들은 그저 말이 없다.
파사성 정상에서 바라본 내가 사는 이포리는 작고 아담한 동네처럼 그저 소박해 보인다.
이포대교 아래 모래가 바닷가 백사장처럼 널린 이곳에 흐르는 강물과 세월에 닳아
바위도 돌들도 매끄러워진 수석으로 남았다.
길가에 구르는 돌보다는 더 가치가 있는지 세월에 닳은 돌을 주우러 오는 사람들이 항상 있다.
사람은 욕심은 끝도 없어 어디를 가나 그저 자기 주머니 챙기기에 바쁘다.
어디나 다 제가 있을 그곳이 가장 좋은 곳이건만
인간의 발길 닿은 곳에는 돌 하나 풀 한포기 남아나질 않는다.
이 다리는 유속이 빨라 매년 한두명씩 물에 휩쓸려 사망하지만
여전히 이곳을 찾는 낚시꾼들의 낚시질은 멈추지 않는다.
위에서 바라본 마을은 그 실상을 알수 없기에 그저 조용하고 아늑할 뿐이다.
가끔 강바람 부는 이포대교 근처 바위에 앉아 있으면 세상과 내가 조용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정상 남문지에서 바라본 여주군 이포리 그 너머엔 이천시까지도 보인다.
내가 사는 이포처럼 난 언제나 경계에서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늘 외로웠는지도 모른다.
그냥 눈 감고 속하면 될 것을 난 언제나 혼자였던 것 같았다.
그 다름으로 오늘의 내가 있고 지나간 시절이 있다.
내가 나를 보듯이 다른 사람들도 그러하다는 것을 이제는 따뜻하게 바라보고 싶다.
삼국시대 불교가 이땅에 들어오고부터 산의 정상 어디에나 있는 불상들과 사찰들
종교라는 것이 이리도 깊이 인간의 삶에 뿌리내려 있는 모습에 그저 답답했다.
파사성 가는 길에는 단 한사람의 사람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나 산의 정상에 가까워지자 옆쪽으로 바위 암벽 아래 어떤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를 하는지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파사성을 찾는 이는 없어도 한낱 바위에 세겨진 마애여래불에 기도하는 사람은 있었다.
처음엔 무속인이 기도하는 곳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고려시대 바위에 조각된 이 불상이 무슨 힘이 있다고 여기에 와서
저들은 저리도 열심히 절을 하며 있는 것일까?
바위가 힘이 있어 도와준다고 믿는 것일까?
아니면 고려시대 어느 석공이 새겨넣은 저 바위에 부처가 임했다고 믿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너무 힘든 상황을 위해
또는 자신의 소원들을 그저 기도가 이루어준다고 믿는 것일까?
이 불상이 있는 곳은 양평군 개군면에 속한다.
파사성은 양평 여주 이천의 경계선상에 있으면서 삼국시대부터 매우 중요한 나들목이였다.
임진왜란때는 왜구의 침략을 막는 요충지로서도 충분히 중요한 곳이였기에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과 조선시대의 다시 복원된 성벽의 양식을 보면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알수 있다.
삼국시대에 축조된 성벽의 돌들은 매우 정교하게 각이 맞추어져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지금은 희미한 흔적뿐인 이 바위에 대고 열심히 절을 하는 남자
보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장면이라 그냥 스쳐간다.
마애여래불 옆쪽 바위 그 틈속에 고여 있는 약수물
준비없이 오른 산행이라 지나가는 이의 갈증을 충분히 해소시켜 주었다.
부처가 있다면 바로 이곳에 그의 자비가 스민 것처럼 느껴진다.
여래불 아래 불전함을 보며 장사속으로 참 열심인 한국의 종교의 일면을 보는듯
종교가 없는 내가 더 좋아진다.
파사성 정상에서 바라본 용문산의 모습이다.
이포대교 아래 모래사장
파사성 정상 돌담을 뚫고 자란 소나무의 생명력이 그저 놀랍다.
그래도 외롭지 않게 두 나무 가지가 서로를 마주보는 모습이 좋다.
서로 엉키고 설키어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기에
이제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로 인해 위로가 되게 해야겠다.
늘 그렇듯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휘청대고 산다.
그 모습을 보며 어찌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파사성 올라가는 입구 여기저기에 진달래가 피었다.
분홍빛 얼굴에 초록의 소나무는 말없이 나그네가 가는 길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다.
소나무 울창한 길을 걸으면 나도 모르게 소나무의 모습에 동화된 듯이 기분이 좋아진다.
만우절 하루를 나는 인간이 아닌 자연과 잠시 보냈다.
그리고 이렇게 그 시간을 이야기로 남긴다.
옆에 있어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파사성이
이렇게 크고 웅장하게 2000년의 시간을 간직한채 있었건만
나의 무심함은 언제나 그냥 지나쳤다.
우리는 때로 너무 가까기 있기에 그 가치를 모르고 그냥 흘려 보낸다.
사람도 그러했을 것이고
여러 가지 행운도 그러했을 것이며
아름다운 기회를 그렇게 보냈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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