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명/살로메의 명상노트

[펌]영화 올드보이 분석

파르헤지아 2008. 3. 24. 08:38

영화 "올드보이" 분석
2007.04.01 20:27
http://tong.nate.com/gogood/36062748

[목차]

 

1. ‘복수’에 관한 영화는 칼부림이 나야한다


2. 근친상간은 숨기고 볼 일이다?


3. 편집증과 사디즘적 욕망 - 이우진


4. 나약한 인간상의 허탈함 - 오대수


 

1. ‘복수’에 관한 영화는 칼부림이 나야한다.


이제껏 ‘복수’는 영화 제작에 있어서 주요한 모티프가 되어왔다. 법과 제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대사회에서는 한 개인이 부당하게 당한 억울함을 앙갚음해주려 해도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복수라는 명목 하의 사적인 폭력행사는 법률에 저촉되는 것이어서 복수를 감행한 자가 범죄자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사건들을 영화로 만들고 감상함으로써 사람들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대리만족을 얻는다.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완벽한 것 같은 사랑 이야기가 현실에서는 실재하기 어려운 허구적인 이야기이고, 용맹무쌍한 근육질 액션 또한 인간의 나약함을 보상받고자 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복수에 관한 영화는 결말에 가서 꼭 칼부림이 나야하고 복수의 대상이 증징되어야 한다. ‘햄릿’의 경우에는 주인공까지 죽음을 당함으로써 비극으로 끝나지만, 복수란 명제에 있어서 주인공의 죽음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오직 복수의 대상이 응당한 처벌을 받느냐가 중요할 뿐이다.


그런데 복수에 관한 영화로 알려진 ‘올드보이’는 이러한 칼부림이 나지 않는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이유에 의해서 사설 감방에 갇혀 15년 동안 만두만을 먹고 살은 오대수, 그가 복수의 일념에 사로잡혀서 대상을 찾아 나서는 장면은 자못 장중하기까지 하다. 영화의 대부분도 복수를 꿈꾸는 오대수의 행보에 할애되어 있다. 하지만, 정작 이우진과 최후의 대결을 펼칠듯한 클라이맥스에 가서는 그가 15년을 만두를 씹으며 자신을 단련한 맛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오히려 오대수는 이우진의 구두를 핥는 똥개로 전락할 뿐이다. 이우진이 쳐놓은 근친상간의 덫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주인공 오대수의 모습은 너무나 처량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복수’라는 일념 하나만을 가지고 행동하던 그에게 세상에서 미쳐 버리지 못한 미련이 있었던가. 오대수의 복수가 이 영화의 주제라면, 그는 일말의 미련도 없이 이우진에게 칼을 꽂아야 했다.


그러면 이우진의 복수가 이 영화가 내세우는 복수의 모습인가? 영화의 전면에 흐르는 오대수의 복수와는 다르게 이우진의 복수는 그 이면에 숨어서 더 큰 구도를 갖추고 있다. 15년 이상을 치밀하게 계획하여 하나의 허점도 없이 실행할 만큼 그의 복수는 체계적이고 주도면밀하다. 그가 원하는 복수는 실제의 칼을 꽂는 것이 아니라,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자신이 당한 것처럼 근친상간의 함정에 빠뜨려서 상대방을 파멸시키는, 보이지 않는 비수를 오대수에게 꽂는 것이다. 이런 복수가 끝나면 무슨 재미로 사냐는 이우진의 말도 그가 복수의 화신으로서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15년을 갈아온 비수를 이우진은 결말에 가서 꽂지 않는다. 오대수의 딸, 미도에게 사실을 밝히면 그의 복수가 완성되는 것인데, 그는 어찌된 일인지 오대수의 짤린 혀에 만족하고 비수를 거둔다. 개처럼 바닥을 기다가 자신의 혀를 자르는 오대수의 모습에 동정심을 느낀 것일까? 복수의 대상에 대하여 동정심을 갖는 것은 복수하려는 자의 진정한 자세가 아니다.


‘올드보이’는 오대수와 이우진이 서로에게 칼을 꽂으려 하는 복수의 중첩구도를 갖추고 있다. 오대수의 행보가 관객들에게 일차적으로 박진감 있게 흐르는 이면에는 이우진이 쳐놓은 복수의 구도가 보이지 않는 손으로 영화 전체의 모양을 빚어내고 있다. 이러한 복수의 중첩구도는 영화의 결말에 가서 서로 맞닥뜨리는데, 어느 것 하나 해결되는 것 없이, 상충된 두 가지 복수가 치열하게 대결을 펼치지도 않고 영화는 허탈하게 끝난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산속에서 몰락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어느 것 하나 복수가 해결되어 가슴 속 맺힌 한이 해소된 것은 아니다. 물론, ‘복수’ 영화가 꼭 복수 대상의 제거로 끝을 맺을 필요는 없다. 그 대상이 너무 거대하고 막강해서 주인공이 결국에는 사무치는 한을 가슴을 품은 채 죽는 영화들도 있다. 가령 지배계급의 폭정에 대항한 조선조 민중봉기를 소재로 한 영화가 그렇다. 관객들은 이러한 영화를 보면서 복수의 보상심리를 만족시키는 것이 아니라, 영화 주인공의 한을 가슴에 새기면서 비극의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하지만, ‘올드보이’는 이러한 계열의 영화도 아니다. 복수가 해결되지 않았으므로 대리만족도 없고, 막강한 대상이 살아남은 것도 아니므로 비극의 카타르시스도 없다. 이 영화가 비극의 복수극으로 끝나려면, 관객들과 시선과 호흡을 같이 한 오대수는 죽고 이우진은 남보란 듯이 잘 살아남아야 한다. 그런데 영화는 정반대의 양상으로 끝을 맺는다. 결국 ‘올드보이’는 ‘복수’라는 모티프가 영화 전면에 흐르고 있으면서도 복수에 관한 영화는 아닌 것이다.





2. 근친상간은 숨기고 볼 일이다?


‘올드보이’에서 복수의 동기이자 해결책이 되면서, 주제에 대한 접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 ‘근친상간’의 문제이다. 이우진이 복수를 평생을 걸쳐 계획하게 된 동기도 자기 누나와의 근친상간에서 비롯된 것이고 오대수에게 복수의 방편으로 사용하여 자신의 딸과 사랑에 빠지게 한 것도 근친상간의 터부를 건드린 것이다. 오대수가 15년을 사설 감방에서 만두만 먹으며 지내야 했던 이유도, 그 15년 후에 이우진이 오대수를 갑자기 풀어준 이유도 근친상간을 완성시키기 위한 이우진의 계략에서 비롯되었다. 복수의 기조가 전편에 흐르는 이 영화가 독특하게 느껴지는 것도 근친상간이란 터부를 복수의 모티프이자 해결책으로 설정했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면 이 영화는 근친상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다루면서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일까?


이우진이 복수를 계획하게 된 동기는 자신과 사랑에 빠져서 성관계까지 맺고 있었던 누나의 죽음이다. 오대수가 슬쩍 흘린 이야기가 소문이 되서 이우진의 누나는 자신이 동생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생각하며 죽는다. 그런데 여기서의 소문은 그녀가 동생의 아이를 뱄다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걸레이니까 임신도 했을 거라는 소문이다. 이우진의 누나는 근친상간의 죄책감에 휩싸여서 죽는 것이 아니라, 임신을 했다는 소문이 무서워서, 자신이 임신을 했다고 상상해서 자살한 것이다. 근친상간한 사실이 밝혀져서 그것이 문제가 되어 이우진의 누나가 죽었다면, 그리고 이우진 또한 근친상간이라는 죄책감과 사랑하는 사람(누나)와의 근원적인 육체적 욕망 사이의 갈등 때문에 괴로운 청년시절을 보냈다면, 이우진이 복수의 방편으로 선택한 근친상간의 방식이 설득력을 갖는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이우진은 단순한 소문 때문에 사랑하는 누나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대수에게 근친상간의 복수를 계획한다. 모티프가 약하고 논리적이지 않고 설득력도 없다. 모티프가 약하므로 15년간 오대수가 갇혀있어야 뚜렷한 이유도 없고 그가 딸과 성애를 가질만한 이유도 없다. 이우진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듯이, 단지 오대수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없애버리면 되는 것이다. 영화의 모티프를 강화하려면, 이 영화는 이우진과 그의 누나가 근친상간한 것이 사람들에게 밝혀져서 주요 이슈가 되고 누나는 죄책감에 자살하고 이우진은 사회에서 내팽개쳐져서 시련을 겪는 모습이 등장했어야 했다. 이렇게 했을 때 근친상간의 문제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가 된다.


근친상간의 모습은 덫에 걸린 오대수와 그의 딸, 미도에게서도 나타난다. 복수의 결의에 차있던 오대수가 갑자기 개처럼 왈왈 짖고 이우진의 구두를 핥는 것은 근친상간의 사실이 드러나게 됐다는 두려움 때문이다. 근친상간은 이미 진행된 사실이고 딸을 죽인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딸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는 것뿐인데 오대수는 이처럼 벌벌 떨어야 했을까? 근친상간의 사실은 중요치 않고 그것이 밖에 드러나는 것, 주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 이 영화가 근친상간의 문제를 대하는 접근방식이다. 근친상간의 문제는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숨기고 볼 일이라는 이 영화의 접근방식은 영화 마지막에 가서 오대수가 딸 미도와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최면술사를 불러 자신의 기억을 삭제하는 장면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인류 역사상 금기시된 사항에 대한 일말의 고민이 오대수에게 있었을까? 그래서 자신의 딸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기에는 좀 괴로움이 있었을까? 괴로움이 크다면 그는 딸의 보호자의 역할로 돌아가서 딸이 잘난 남자 만나 행복하게 가정을 이루며 사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포기하고 딸과의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조작하는 방식을 택한다. 이것 또한 타인에게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근친상간의 사실을 숨기려는, 문제를 ‘덮어두고 감추는’ 방식에 불과하다.





3. 편집증과 사디즘적 욕망 - 이우진


복수를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근친상간의 문제가 탄로날까봐 벌벌 떠는 이 영화의 인물들은 주어진 환경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고 개척해 나가는 모습이 아니라, 주어진 틀 안에서 발버둥치다가 스러져가는 나약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오대수는 이우진이 설정해놓은 함정에 갇혀서 발버둥치지만, 결국은 그 함정의 한가운데 고스란히 앉아있게 되고 이우진 또한 논리적이지 않은 복수의 짐을 지고 싸이코처럼 살다가 그 짐을 풀어놓고는 자유와 삶에 대한 의미를 잃고 스스로에게 총알을 날린다. 마치 유리상자 안에 가둬놓은 쥐 두 마리가 어떻게 행동하냐를 관찰하는 것이 영화감독의 의도였을까? 등장인물들은 주어진 환경의 틀 안에서 숨 가쁘게 뛰어다니고 때론 요동을 쳐대지만, 결국은 그 틀 안에서 숨을 죽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먼저 이우진의 행동방식을 보면 스케일은 크지만 편중되어 있다. 오대수가 흘린 말 한 마디가 이 사람 저 사람 거치면서 소문으로 퍼져서 결국 자신의 누이가 자살하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대수를 15년 감금하고 그의 아내를 죽이면서 가족을 파탄시킬 정도의 죄목은 되지 않는다. 악의를 가지고 퍼트린 소문도 아니기 때문에 한 아름의 악행록을 쓴 오대수 조차도 기억치 못하는 죄목이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이우진의 부정적 성격이 묘사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기억하지도 못하는 말 한마디로 상대방의 인생을 파멸시킨다는 것은 이우진이 정신병적 집착증을 가지고 있다고 밖에 해석할 수 없다.


지난 주말 한강에 투신한 만두 제조업체 사장이 이 영화 ‘올드보이’의 주인공 최민식을 유서에 언급했다고 한다. 최민식에게 자신은 정말 먹는 것 갖고 장난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최민식은 ‘먹는 것 가지고 장난치는 사람들은 확실히 처벌해야 한다. 인권을 논하면 안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실제로 최민식이 그런 말을 했다면 그 말의 내용이 중기업체 사장을 자살로 몰고 간 직접적인 동기가 됐을까? 아니다. 자투리 무로 만두소를 만든 것을 쓰레기 만두라 과대포장하여 언론이 떠들기 시작했고 전국민이 동요하면서 만두 제조 중기업체들이 느닷없는 경영난에 부닥친 것이다. 직접적인 동기는 만두파동이지만, 누가 그 사장을 죽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쓰레기 만두라 떠든 언론을 탓할 수도 있고, 사먹지 않은 국민들을 탓할 수도 있고, 아니면 ‘죽을 용기를 가지고 독한 맘먹고 살지’ 할 수도 있다. 구지 누구의 책임이냐고 물으면, 이 사회가 또는 본인이 책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이우진 누이의 죽음의 책임도 오대수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대수가 발설한 한마디 말을 꼬리에 꼬리를 붙여 퍼트린 사람들, 그리고 개개인의 문제인 혼전 성관계나 임신을 커다란 죄악으로 치부하는 사회의 분위기, 그리고 결국 그러한 성관계의 직접적인 당사자인 이우진 본인과 의지 빈약한 누이가 그 책임을 져야한다. 그런데 이우진은 그 모든 책임을 오대수에게 덮어씌운다. 논리적으로 맞질 않는 그의 심판은 그가 편집증적인 집착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이우진의 싸이코적인 면모는 영화 중반에도 나타난다. 미도의 가슴을 만진 사설감방 관리자의 손목을 잘라서 보라색 상자에 담아 오대수에게 보내는 것이다. 오대수가 그 관리자의 손목을 원해서 보냈다고 하는데, 오대수는 복수의 대상이므로 이우진이 그런 자비를 베풀 이유가 없다. 사실 이러한 장면은 나중에 결말 부분에서 미도가 보라색 상자를 쉽게 열지 않게 만드는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지만, 그래도 극중에서 자선을 베푸는 이우진의 모습은 행동의 일관성이 결여됐다는 점을 보일 뿐이다.


결말에 가서 이우진이 복수를 완결지은 것도 아닌데 총으로 자살한다는 설정은 그가 그동안 복수극을 진행시키면서 보여준 용의주도한 모습에 반대되는 나약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나타내준다. 오대수가 개처럼 낑낑거리다가 혀를 자르는 것을 보고 우는지 웃는지 손수건으로 입을 막고 끼득거리는 이우진. 그의 사디즘적인 욕망이 모두 해소된 것이 복수를 끝내지 않고도 인생을 마감할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가 아닐까?





4. 나약한 인간상의 허탈함 - 오대수


영화 초반 파출소에 끌려가 꼬장을 피우면서 한시바삐 그 곳을 벗어나려 애달아하는 오대수의 모습은 현대사회의 각박한 구조물에 얽혀서 살아가는 중년남자의 자화상이다. 스스로 그러한 구조물에 갇히는 동기를 제공하면서도 언제라도 그곳에서 벗어나고픈 욕망을 주체지 못한다. 파출소를 벗어나면 이제 완전한 해방을 맞을 것 같다. 하지만, 곧바로 그는 사설 감방에 갇히게 된다. 잠깐씩 일정한 장소에 갇히는 것은 좋다. 사무실에서, 집에서 또는 가끔 파출소에서. 그러나 한 곳에서 15년을 갇히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15년을 갇혀 지내면서 그는 그대로 몰락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새롭게 단련시킨다. 매일 보는 텔레비전을 통해 수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스스로 벽치기를 하면서 체력을 단련시킨다. 하루하루 대충대충 살아간다는 생활방식은 완전히 뒤바뀌어 단단한 의지로 똘똘 뭉친 열정의 사나이로 거듭 태어난다. 이쯤에서 관객들은 오대수의 변신에 큰 기대를 가지고 지켜본다. 이제 드디어 그가 큰일을 저지르겠구나, 한 몫 하겠구나 하고.


이러한 기대는 그가 쇠젖가락으로 감방의 탈출구를 완성할 즈음에 와서 고조되기 시작한다. 그런데 감방에서의 탈출은 ‘쇼생크 탈출’처럼 그의 처절하면서도 투철한 의지의 산물이 아니다. 구속된 곳으로부터의 탈출은 느닷없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이뤄진다. 이처럼 주인공의 의지나 발버둥침에 상관없이 그가 살아갈 곳, 환경이 주어진다. 쇠젖가락이 다 닳도록 감방 벽을 10여년이 넘게 후벼 판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결국 주변 상황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하여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주인공은 그저 나약한 자로서 그 상황을 받아들일 뿐인 것이다.


오대수가 폭력배 무리를 때려눕히면서 복수의 대상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관객들은 다시 그의 의지력이 발휘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복수의 대상, 이우진을 만나서는 정작 15년 동안 갈고 닦은 주먹의 맛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냥 개처럼 낑낑거리며 꼬리를 감출뿐이다. 이우진이 쳐놓은 덫에 걸린 오대수는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상황에 반발할 수도 없는 나약한 존재인 것이다. 그의 나약함은 그의 딸 미도와 함께 지난날의 기억을 지우고 살아간다는 결말에 가서 극에 달한다. 여기서 그는 딸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나약함을 지나 떳떳치 못한 인간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 영화는 인간의 의지력이 얼마나 허탈한 것인가 하는 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15년을 갇혀서 내공을 쌓았어도 그 사람에게 씌워져 있는 삶의 굴레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쇠젖가락으로 후벼 파는 것과 같이 굴레를 벗어나려는 행동은 전혀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만다. 그 굴레는 개인의 의지에 상관없이 주변에서 주어지는 것이므로. 이렇게 하나의 구조물 속에서 나약해질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이 이 영화가 제시하는 세계관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관객들에게 복수에 관한 보상심리도, 비극의 카타르시스도, 근친상간에 대한 심오한 고찰도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줌으로써 허탈한 심정을 갖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