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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무 교수, 친일파 손자로 서울대 총장 자격 없어”

파르헤지아 2006. 11. 27. 19:12
서 부 련 -
얼마전 KBS 뉴스에서 서울대 총장 선거에 대한 짤막한 논평을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 제목은,
“이장무 교수, 친일파 손자로 서울대 총장 자격 없어”
였습니다.
그 내용인 즉,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모임은 서울대학교 신임 총장 선거에서 1위를 차지한 이장무 교수가 친일 역사학자인 고 이병도 박사의 손자이기 때문에 서울대 총장 자격이 없다며 이 교수에게 후보 자격을 포기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들은 고 이병도 박사가 일제시대 일본 역사학자들과 함께 통일신라 이전의 역사를 왜곡하고 실재했던 단군의 역사를 신화라고 격하하는 데 앞장 선 대표적 친일 역사학자라며 이 같이 주장했습니다.
또, 이장무 교수가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경우 정부가 임용을 거부해야 한다면서 이 교수 임용 반대를 위한 운동을 해 나가겠다고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할아버지의 친일 문제나 사관에 대해서는 역사학자가 밝힐 것이고, 과학분야에서만 공부해온 자신은 잘 모르는 일이지만, 논란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서울대가 민족대학으로 발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생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문교부 장관과 학술원 회장을 지낸 두계 이병도 박사는 일본 와세다 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뒤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가 됐고, 일부 사학자들로부터 고대사를 왜곡한 친일사학자라는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내 생각은 이렇습니다.
해방이 되며 “이승만”정권이 들어서자 친일(親日)에 앞장 섰던 교육계의“김활란”, 문학계의“이광수”, 역사학계의 “이병도“같은 사람들이 급조 애국자로 둔갑 국민의 사표(師表)가 되고, 부정부패를 일소하겠다고 나선 군사정권은 또 다른 부정부패를 형성하는 악순환을 되풀이 하면서 "정의와 도덕" 보다는 “수단과 방법”만을 강조하였습니다.
이제, 다시 두계 이병도의 손자 이장무 교수가 서울대 총장 후보로 나섰다는데 서울대 교수들이 그 후보를 총장 선거에서 1위로 뽑았다 합니다.
정녕 이장무 교수가 이 나라와 서울대를 사랑했다면,
후보 출마 자체를 삼가했어야 했으며,
주변의 추천이 빗발 쳤다 하더라도 인격적으로도 고사 했어야 한고 생각 하지만,
무엇 보다도 서울대 교수들의 그 썩어 빠진 민족관과 정신에 더 울분과 이 민족의 비애를 느낍니다.
국가 백년지 대계의 동량(棟梁)들을 그런 작자들에게 맡기고 이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기대하고 있었으니,
정말로 우리나라 애국가 가사대로 하느님이 보호하지 않으면 그 앞날이 요원 하기만 한 것 같아 이 글을 안쓸 수가 없습니다.
당시, 독립투사들은 자녀의 교육은 커녕 가족의 생계까지 팽게치고 나라를 되찾기위해 몸부림칠 때,
국가 반역자들은 온갖 작위와 재물을 거머쥐고 자녀 교육에 몸 바쳐 해외 유학은 기본이었으니,
해방 후 평균 학력이 그나마 남자라야 겨우 중졸이었던 시절에 해외 유학을 하고 온 민족 반역자들의 자손은 최소한 학사 이상이었으니
권력과 부의 대물림은 뻔한 것일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우리 순박한 백성들이 마음 속에 새길 수 밖에 없던 처절한 한(恨)은
"내가 굶어도 자식은 가르쳐야 되겠다!"는 일심으로 소 팔고 논 팔아 "상아탑을 우골탑"으로 만들고 말았으니---,
그 심정들이 우죽했을까!!
이젠 나라가 망해도 나몰라라 하는 것이 상책이란 뜻으로,
"아는게 병이다."란 말과
"모르는게 약이다."란 속담이 인구(人口)에 회자하게 되었다.
진짜 모르는게 약이다.
우스게 말로, 너무 알려고 하면 다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제시대 때 자칭 민족지(?)라고 자부하던 동아일보에 연재하여 불후의 명작(?)으로 남은 춘원 이광수의 소설 "이순신"이 아닌가 한다.
이광수는 민족사의 구국영웅으로 추앙되고 있는 “이순신”을 우리 민족을 “열등한 민족”으로 부각시키는데 교묘하게 이용하여 "친일의 도구"로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광수가 소설“이순신”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시기 1931.5.30~1932.4.2)는, 일본이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켜 중국대륙의 침략을 시도하던 때입니다.
“이순신”이 누구인가?
일본으로서는 조선정벌을 실패하게 만든 천추의 한이 된 "조선의 구국영웅”이 아닌가.
그런 인물을 일제식민지 시대에, 그 것도 중국을 침략하려고 만주 사변을 일으킨 해에 조선민족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양시킬 수 있는 인물을 주제로 한 소설을, 신문에 연재하도록 했으니---,
그 당시 일본 놈들의 머리가 돌지 않았다면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전선에서는 일본제국의 운명을 걸고 피 터지게 싸우는 판에, 후방에서는 왜적을 물리친 조선의 “호국영웅”을 자칭 민족지(?)라는 “동아일보”에 연재하게 하다니---!
“만세”만 불러도 감옥으로 가는 그 암울하고 살벌한 시국에 ---- ?
당시, 조선 총독부가 제정신이라면 “동아일보”를 폐간하고, 이광수를 당장 서대문 형무소에 처넣었을 것이 아닌가!
조선총독부는 그렇다 치고, “이광수”와 “동아일보”는 죽기를 작정하고 “민족혼”을 고양시키기 위하여 스스로 휘발유를 지고 불속으로 뛰어들었단 말인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신문뿐만 아니라 출판물에 연재하는 창작물은 모두, 지금이나 그때나 그 집필의도와 대강의 줄거리를 사전에 편집자와 협의 또는 고지하도록 하는 것이 관행입니다.
대충 짐작이 되지 않습니까?
당시, 조선총독부와 동아일보, 이광수의 관계가------.
이광수는 상해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주필 자리를 때려치우고 귀국한 다음, 조선과 그 민족에 대한 이야기라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했다는데 -----.
그는 1922년 자신이 발표한 “민족 개조론” 이라는 글에서,
전국에서 일어 난 3.1운동을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지각없이 일으킨 사건” 이라며,
조선인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게으르고, 믿을 수 없고, 비겁하고, 이기심으로 얼룩진 더러운 종족”이라고 비난하고, 그러한 타락한 민족성 때문에 조선은 독립능력이 없다고 못 박았다 한다.
이광수 왈, 우리는 조선민족의 존재를 버리고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민족으로 통째로 바꾸어야 하며,
우리와 같이 더러운 민족성을 가진 "조센진"은 독립일랑 꿈도 꾸지 말고 문명국가 일본제국의 보호와 지배를 받아야
“타락한 민족성”을 개조해서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런, 적극적인 친일파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소설 “이순신”을 연재하며 묘사한 임진왜란 당시(1592년, 선조25~31)의 조정대신들은, 허구한 날 당파 싸움이나 일삼고 계집질이나 하며 중국(명나라)에나
의존하다 나라를 말아먹은 병신들의 집단이었다.
또한 그 당시 조선국왕은 우유부단한 겁보에다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는 소심한 소인배이고, 백성은 한심한 족속들의 무리에 불과한 것으로 묘사했다.
서 부 련 -
그 선조로 인하여 생긴 생선 이름 "도로 묵"을 아십니까?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몽진 때 그나마 "묵"이란 생선을 맛있게 먹고, 그 생선의 배가 하얗다하여 "은어"라는 명칭을 하사 했는데,
환궁 후에 다시 그 생선 맛을 보니 다시 산해진미에 길들은 입맛에
그 생선 맛이 예전같지 않자, 다시 이름을 "묵"으로 돌리라 해서 얻은 이름--- "도로 묵",
차도 없던 당시 생선을 산 채로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공수하려니 그 고초가 오죽했을까요!
그 후 갖은 고초를 겪고서도 일이 잘 못되면 일컬어 "말짱 도로 묵"
이라고 하지요~~~
그 생선 이름 만큼이나 영욕이 교차했던 "이순신",
그 武人을 존경하라고 나중에 박정희는 "성웅"이란 접두사를 붙여 그 후광의 곁불이라도 쬘려고 했으니~~~
이광수는 소설에서도,
"이순신”만큼은, 사리사욕에 들끓는 아귀다툼의 당파 싸움 속에서도 초연하고 간신무리들의 모함에도 불구하고 "백의 종군"하여 나라를 구한 유일한 "호국영웅"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광수는 “이순신”을 부각 시킨다는 것을 빙자하여,
조선의 임금은 물론 조정대신들과 백성들을 모조리 싸잡아서 자연스럽게 쓰레기들로 묘사하여,
일반 대중들(독자들)로 하여금 조선민족이라는 자신의 출신에 대하여 스스로 모멸감을 갖도록 유도했던 것입니다.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의 "소수의 사람을 잠시는 속일 수 있지만, 모든 사람을 항상 속일 수는 없다”는 유명한 말이 생각납니다.
어쨌든, 이광수는 임진왜란 때는 비록 일본이 조선을 집어 삼키지 못했지만, “이순신”같은 걸출한 영웅이 없는 지금의 시대(일제식민지 당시)에 탐관오리들의 후예들만 판을 치던 "조선은 망해도 싸다"는 것을 부각시켜,
"우리 민족은 일본의 보호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당위성을 자연스럽게 전파 시켰던 것이다.
그와 같이,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해에 “동아일보”에 소설 “이순신”을 연재토록 한 것은 “망해도 싼 나라”를 정복하는 것은 “정의의 징벌”이고, “침략”이 아니라 “구원”이라는 의식을 암암리에 조선백성들에게 심어주고자 한 조선총독부, 동아일보, 이광수 등이 치밀하게 계획한 야비하고도 파렴치한 작태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순신! -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 해군의 신화 “도오고오”는 누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제독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영국의 넬슨이야 감히 내가 견주겠지만, 조선의 이순신 장군은 제가 신발에 끈을 맬 자격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합니다.
더구나, 조선 민족이면 누구나 추앙해 마지않는 “이순신”을 소설로 이용하여, “이광수”는 그 반대급부로 이순신을 제외한 모든 조선인은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연스럽고도 철저하게 부각시킨 것이다.
그 여파가 면면이 계승되어,
일부 철딱서니 없는 작자들은 아직도 두계 이병도가 전파한 "식민사관"에 물들어 있어서 “엽전은 어쩔 수 없다”는 패배의식을 지금까지 갖고 있음을 잊지 말라!
그 후부터 "엽전들은 맞아야 말을 듣는다”는 말이 유행했다나!
즉, 이광수는 소설 “이순신”을 통하여 조선민족의 열등함을 자학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썼던 것이다,
문학을 통한 세뇌교육은 그토록 무섭고도 질긴 것이다.
임진왜란이 어떤 전쟁이었던가!
일본은, 처절한 100년 동안의 세력다툼을 거처 "도요또미 히데요시(풍신수길)”가 방금 섬나라를 통일한 시기였다.
싸움이 이제 막 끝나 뒤숭숭한 섬 나라에서, 싸움이라면 이골이 난 사무라이들이 여기저기에서 득실거리는 것이 내심 못마땅하고 불안하여, 그 쓸모가 없어진 “싸움 꾼 사무라이”들을 나라 밖으로 내몰아 정권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의도된 전쟁이 아니던가----!
석 달이면 조선을 정복할 수 있다고 장담한, 싸움으로만 단련된 일본이 조선민족의 끈질긴 7년에 걸친 처절한 저항 끝에 결국 퇴각하게 된 저변엔, 이광수가 그렇게 한심한 족속들로 매도한 조선백성들의 힘이 있었던 것이다.
선비는 붓 대신 칼을 들고, 농부는 농기구를 무기삼고,
아낙네는 행주치마에 돌을 나르며, 승려는 목탁 대신 창을 들고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30만이 넘는 사무라이들을 상대로 석 달이면 족하다는 전쟁을 7년이나 버티다 끝내는 물리쳤던 것이다.
그런, 조선민족의 면모를 이광수는 “이순신”이란 연재소설을 빙자하여 그렇게 매도하며 친일에 앞장섰건만, 민족의 단죄는커녕 해방 후에도 위대한 소설가로 추앙 받도록 교육을 시킨 이 나라는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나라인가!
독립투사의 자손은 못 먹고 못 배워 병약한 몸으로 길거리를 배회하고, 친일파의 자손은 해외 유학에 물려받은 재산으로 떵떵거리고 사는 이 나라---, 하긴 독립군을 뒤쫓던 일제시대 때 경찰간부가 해방 직후에도 경찰간부로 행세하던 나라꼴이라니!
이제, 그 두계 이병도의 손자가 국립 서울대 총장이 될 판이다.
아~~~ 역사는 반복되는가!
"성웅 이순신"을 부각 시킨다는 빌미로,
온 백성을 쓰레기로 부각 시켜서도 안되고----,
다시 두계 이병도의 손자를 서울대 총장으로 만들어 후세들이 우리를 일컬어 "재활용도 못하는 쓰레기들"로 부르게 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오호 통재라~~~
정녕 모르는게 약인가!
아는게 병인가!
(일면식도 없는 이장무 교수님께는 죄송 합니다. 혜량하시옵길...!)

출처 - 이광수와 이순신 | 낙서장 2006/07/19 05:03 http://blog.naver.com/indehero/100063762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