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르헤지아 2017. 5. 26. 01:28

바람이 불었다 / 백선혜

 

네 앞의 나는 작고 초라한 나무 한 그루였다.

힙겹게 한 걸음 다가섰다 나로 인해

네가 힘들어질까 두려워 두 걸음 물러섰다.

 사랑할 수 없는 무능한 자의 슬픈 탄식같은 긴밤

나는 통곡의 눈물로 네게 가는 사랑의 마음을 죽여야만 했다.

 

가끔은 너무 사랑해서 다가설 수 없는 그런 사랑도 있다는 것을

세월이 흘러 바람이 지나고 나서야 이제 말한다.

불행한 사람은 사랑을 놓치는 것으로 사랑할 수 밖에 없다.

행복한 사람은 이런 이유를 알지 못하기에 때늦은 고백은 언제나 슬프다.

 

사랑의 이름으로 동정받지 않으려 사랑앞에서 도망쳤던 그때의 나는

가끔 아주 가끔 술에 취해야만 전화를 거는 너의 마음을 안다.

바람이 불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바람에 흔들린다.

내가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다가섰던 그때와 나처럼

술에 취한 너의 마음에 그때 닿지 못했던 내 맘의 조각이 닿았음을.

 

어느 날,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부는 것으로 자신을 드러낼 뿐 그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

 사랑 앞에 초라했던 나는 그래서 사랑 앞에 용감해지기로 한다.

다시는 용기없음으로 인해 사랑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비록 내 맘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나는 사랑앞에 솔직하게 다가갈 것이다.

 

2004. 12. 26 일요일 늦은 밤에 쓴글을 2017년 5월 26일 새벽에 고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