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식 레코드(The Akashic Records) 란?
아카샤의 기록(Akashasic Record)에 대한 가설
물리계와 정념계
아카식의 설명에 앞서 물리계와 정념계에 대해 이해가 필요하다.
물리계란 물질들의 집합체이며 ‘시간’이라는 것이 흘러가는 계를 말한다.
정념계란 영혼(정신 혹은 정념)들의 집합체이며 시간과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계를 뜻한다. 정념계의 영혼들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고, 입증하고 싶은 본능만을 가지고있다. 정념계의 영혼들은 자신들의 본능 충족을 위하여 물리계의 생명체에 ‘송과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들과 생명체들을 연결한다. 여기서 말하는 생명체란 감정을 가지고있는 물질들을 일컫으며 정념계의 영혼들과 연결이 되었을때에 비로소 ‘생명’이란것을 가지게 된다.
아카식(The Akashic) 이란?
이르니아의 세계에선 아카식이란 것이 존재한다. 아카식이란 쉽게말해 하나의 공간단위 이다. 여기서 공간단위란 시,구,동같은 명칭적 혹은 지리적 단위가 아닌, 공간 자체의 단위를 뜻한다.
아카식은 정념계의 부수적인 현상이며 효과이다. 왜냐하면 정념계의 수많은 영혼(정신 혹은 정념)들은 마치 블랙홀과 같은 강한 힘들에의해 뭉쳐져있으며 그 뭉쳐진 단위 하나하나를 아카식이라 정의하기 때문이다.
시공간이 없는 정념계에서 ‘뭉쳐진다’라는 행위가 가능한 것은 강한 힘들 덕분이다.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강한 힘에 의해 시공간의 왜곡될 수 있다.
그 실 예로, 비행기안에선 10억분의 1초씩 느리게 간다거나
지구궤도를 대략 7만4천KM의 속도로 돌고있는 우주비행사들은 시간이 더 느리게 간다 등이 있다.
각각의 아카식은 하나의 공간과 무한한 시간을 가지고있다.
그 중 시간은 아카식 레코드(The Akashic Records)에 정렬이 되어있다.
아카식 레코드(The Akashic Records) 란?
아카식 레코드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영혼들의 경험이 저장 되어 있는 레코드’라 할 수 있다. 즉, 영혼들의 경험들이 이 레코드에 기억되어 있는 것이다. 이르니아에서는 시간과 공간을 실재론으로 본다. 시간과 공간은 이미 실재하는 것이고 그것에 따라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운명(아카식 레코드)은 정해져있고 그것을 바꿀 순 없다.
예를 들자면, A라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정념계의 A`라는 영혼과 연결되어있다.
어느날 A가 길을 가다가 바람에 의해 나무의 잎이 떨어지는 것을 봤다.
그렇다면 그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을 본 경험은 이미 아카식 레코드에 존재한다. 이유는 정념계에 시간의 개념이 없기때문이다.
사실 경험 이란 말 자체가 정념계엔 통하지 않는 것이다.
영혼들은 시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할 수 도없는 것이고
당연히 어떤 사건이 먼저 일어났다 혹은 나중에일어났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모든 사건이 이미 정렬되 있는것 같이 아카식 레코드가 존재 하는 것이다.
아카식 하나에는 아카식 레코드가 하나씩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이 영혼들의 뭉침 단위 하나가 아카식이기 때문에 그 영혼무리 들의 경험이 곧 아카식 레코드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 이상이 존재 할 수 없다.
사실 아카식 레코드를 ‘존재한다’ 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아카식 레코드란 단지 영혼들의 수많은 경험덩어리를 일컫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카샤의 기록(Akashic Record)이란, ‘공간의 기록(Space Record)’ 이란 뜻으로서, 우주 속의 모든 것들의 움직임이 우주 공간(akasha) 자체에 기록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아카샤(akasha)는 산스크리트(Sanscrit) 말로서, 공간(space)이란 뜻이다.
우주나 물질이나 원자나 모든 게 원자 입자를 이루고 있는 쿼크이고
그 쿼크의 가느다란 띠 일종의 파동.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도 원래는 형체가 없고 이 쿼크 띠의 파동인 셈이죠.
그리고 아카샤란 그 쿼크의 파동을 기록하는 물질이랍니다.^^*
참말로, 모든 옛 일들이 공간에 기록 되어 있어서, 그것을 다시 읽을 수만 있다면, 내가 살지 않았던 때의 일들과 다른 사람들의 일들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문제는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이다.
여기서, 모든 옛 일들이 공간에 기록되는 것은 어쩌면 과학적으로 설명하기가 좀 쉬울 수 있지만, 그 기록을 다시 읽어 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 글에서, 그 설명을 시도하고자 한다. 물론, 정교하지 못한 가설일 뿐이다.
산 것이든 죽은 것이든, 몸이라는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핵과 전자로 이루어져서, 둘은 각각 양성과 음성의 전하를 띤다. 따라서, 원자 주위에는 미약하나마, 핵과 전자에 의한 전기장이 형성되고, 전자나 핵이 활동하거나 원자가 움직이는 경우에는, 그에 따른 전자기파가 주위로 퍼져나간다.
이 공간으로 퍼져 나가는 전자기파는 곧 자신의 움직임을 공간에 전자기파의 형태로 기록한 셈이다. 이것이 바로 공간에 움직임을 기록을 하는 원리 이다. 물론, 퍼져 나가는 전자기파는 공간에서 멀어질수록, 그 힘이 줄어 들겠지만 말이다.
현상계의 본성은 파동이므로 소리가 음반위에 기록되듯이 물질우주속의 모든현상과
사건들은 시공을 초월하여 고스란히 아카샤라는 매질위에 기록된다고 한다.
아카샤란 '최초의 원시물질'이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인데, 형이상학자들이 말하는
우주심과 같은 것으로, 이 근본질료는 우주 전체에 충만해 있으며 무한히 정교한 것
이어서 자극에 매우 민감하고 우주 공간 어느 곳으로부터의 경미한 진동이라도
그 위에 지워지지 않는 인상을 남긴다고 한다.
이 아카샤의 기록을 히브리 신학자들은 신의 기록을 담은 책이라고 부른다
어쨌든, 기록은 이루어진다.
다만, 그 미미한 기록이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완벽히 재생 가능하느냐의 문제가 남아 있다.
그럼 이번에는 그 공간상에 기록된 전자기파를 다시 어떻게 재생하느냐의 문제이다.
이를 위한 중요한 하드웨어는 바로 우리의 뇌(골)이다.
현대 과학에서 아직, 우리 머리 속에서 일어나는 기억에 대한 비밀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어쩌면, 기억은 우리의 뇌에서 기억되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만물의 모든 움직임이 공간에 기록된다면, 생명체는 굳이 자신의 몸 속에 또 다른 대용량의 기억장소를 둔 다는 것은 비용의 낭비이며, 진화는 비용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동물들을 보라, 어미가 가르쳐 주지 않은 많은 것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그 기억들을 어떻게 떠올리는 것일까?
이러한 사실은, 어쩌면, 뇌가 기억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의 단서일 수 있다.
만약, 그렇다면, 그럼 뇌의 용도는 무엇인가? 옛날 과학자들 중에는 뇌를 일종의 방열판으로 생각했다고 하던데, 그 밖에 어떤 용도로 상상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뇌를 일종의 안테나로서의 역할로 보는 것이다. 즉, 이 안테나를 통해, 과거의 기억들을 수신하는 것이다.
즉, 과거의 물체의 움직임으로부터 발생하여, 공간에 수없이 돌아다니는 전파들을 잡아서 알게 해주는 역할이 바로 뇌가 아닐까?
그럴듯한 것이, 뇌를 이루는 뇌신경 세포를 보면, 일종의 수많은 전기회로들이다. 텔레비전에 달린 동그랗거나 길다란 안테나를 보자. 그 안테나 주위로 전파가 지나가면 그 안테나에 전류가 발생하고, 그것은 결국, 전기 회로를 통해 화면에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뇌 속의 수많은 신경 회로들 주변으로, 과거 기억을 담고 있는 전자기파들이 지나간다면, 그 신경 회로에 전류가 흐를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는 그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설명이 맞다면, 또 다른 여러 주제들이 파생된다.
예를 들어, 그렇다면, 왜 내가 겪은 일들만을 기억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기억은 왜 떠 오르지 않는가 하는 문제와 같은 것들이다. 이 문제의 경우에는 주파수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즉, 간단히 말해서, 사람마다 발생하는 주파수가 달라서, 자신이 발생시킨 전자기파들은 자신과 같은 주파수를 가지고 있어서, 잘 수신할 수 있는 반면에, 자신과 다른 주파수를 갖는 다른 사람들의 전자기파들은 잘 감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다른 사람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기억해 내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 의문의 답을 알아 보기 전에, 주파수에 대해 더 살펴 보기로 한다. 주파수라는 말이 나오면, 보통 같이 등장하는 단어가 튜닝(Tuning; 동조)이라는 단어가 있다. 튜닝이란, 쉽게 말하자면, 라디오에서 원하는 방송의 주파수에 맞추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굳이 튜닝 하지 않더라도, 우리 자신이 했던 일들로 만들어진 전파는 쉽게 수신하여 기억해 낼 것이다. 왜냐하면, 그 전파의 주파수는 지금 나의 주파수와 이미 같기 때문이다. 한편,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마음먹기에 따라서, 튜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뭔가를 기억해 내기 위해, 고심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자, 시험지에 답을 적으려고 고민하는 상태라던가, 무언가를 찾으려고 떠올리는 상태, 보통 이런 때에는 우리는 마음을 가라 앉히고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것이 바로 우리가 튜닝 하는 때이다. 물론, 이때는 내가 한일을 기억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파수는 이미 맞추어져 있으므로, 증폭률을 올리는 것일 것이다.
즉, 그 전파의 수신 감도를 최대한 올리려고, 다른 방해 요소로부터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음을 고요히 하고, 집중하는 것이다. 자 이제, 그렇다면, 내가 하지 않은 일들은 어떻게 떠올릴 수가 있을까? 그것은 바로 그 일을 발생시킨 주체의 주파수로 나를 튜닝 하는 것일 것이다. 어떻게 그의 주파수로 맞출 수 있을까? 그것은 내가 그의 입장이 되는 것이다. 과장하면, 내가 그것(또는 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그것의 입장이 되어야 그것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자격이 된다.
내가 아닌 다른 것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단, 하나, 애초에 너도 나도 다 나라면 해결이 된다. 그것을 우주심, 신, 인내천, 천상천하유아독존, 일체유심조 등 여러가지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별도로 긴 설명이 필요할 듯 하고, 어쨌든, 애초부터 나와 너의 구분이 원래 없는 것이라면, 너가 내가 되고 나도 네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만, 그렇다 치더라도, 기술적인 문제가 남아있다.
즉, 어떻게 해야 내가 네가 될 수 있느냐 하는 방법이다. 그 방법은 나만의 고정된 생각의 틀(고정 관념)을 벗어나서, 그 또는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고, 다양한 생각의 방법들을 가지고 있고, 그러한 경험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 대상의 정보를 가지고, 집중을 하여 그의 입장으로 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나의 뇌신경의 안테나들을 그의 입장에 맞게 튜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평소에 몰랐던 그에 대한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가능한 것이다. 여기서, 열린 마음이란, 아무것도 고민하지 않는 텅 빈 생각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다양한 고민과 부딛힘을 통해서, 갈고 닦아 온 생각하는 관점의 자유로움이다. 생각하는 방식의 유연함이다. 남을 배려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이해심이며, 그로부터 갖추어진 매너이다. 이러한 능력은 곧 너그러움과 사려 깊은 인품을 요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며, 신비로운 방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닌, 삶의 풍요로움과 자유로움과 진지함에서야 만이 얻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