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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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demonic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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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를 쓰는 데는 왕도가 없습니다. 누군가는 "그냥 열심히 쓰면" 된다고도 하고,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빨리 포기하라"는 사람도 있습니다. 게다가 '시나리오'라는 분야는 영화 좋아하는 사람들이 조금은 '만만하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영화 좋아하시는 분들, 이런 경험 한두 번씩 있으실 겁니다. 친구들끼리 영화 한 편을 보고 맥주 한 잔을 하면서 이 얘기 저 얘기 합니다. 영화가 형편없을 땐 대화가 더 활기를 띠는 법이죠. 그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안주 삼아 씹을 때 누군가 한 마디 던집니다. "저 정도 얘기라면, 나도 시나리오 쓰겠다."
또 누구나 살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 한두 가지쯤은 가지고 있을 겁니다. [택시 드라이버](76) [분노의 주먹](80) [예수의 마지막 유혹](88)의 시나리오를 썼던 작가 겸 감독 폴 슈레이더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신참 작가라면, 당신이 내놓아야 하는 소재는 당신 자신에 관한 것뿐이다. 각자의 인생엔 독특하면서도 값어치가 있는 소재가 반드시 있다. 작가는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얼마나 다른가를 말하는데서 그쳐서는 안 된다. 당신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어쩌면 시나리오는 '살아온 인생'과 종이와 펜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작업이죠. 그래서 시나리오 파트는 '영화 지망생'들에게 가장 진입 장벽이 낮은 분야처럼 여겨질 수 있는 거고요. 하지만 시나리오가 100편 있으면 한두 편 영화화될까 말까 한 현실을 보면, 정말로 '작가'가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인내심과 재능과 오기와 열정이 없다면, 그 고독한 작업을 견디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시나리오 작가가 되겠다고, 아니 시험 삼아 시나리오를 한 편 써 본 후에 자신의 가능성을 타진해보겠다고 생각하셨다면, 의외로 도움 받을 곳은 많습니다. 수많은 학교의 영상 관련 학과에서 시나리오를 가르치고 있고, 학원 형식의 과정도 찾아보면 많습니다. 서점에 가면 수십 권의 시나리오 작법서가 있고요.
일단 관심을 가진다면, 꽤 여러 곳의 공모전도 눈에 뜨일 겁니다.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시나리오 마켓'(www.scenariomarket.or.kr)에 가 보시면 넘쳐날 정도의 정보가 있고요. 문제는 쓰려는 사람에게 달린 거겠죠. 과거와 달리, 그렇다고 아주 풍족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작가가 될 수 있는 환경은 어느 정도 조성되어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구체적인 시나리오 작법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겁니다. 그런 얘기는 여러 책에 상세하게 나와 있고요. 저는 어떤 '태도'에 대한 이야기를 드리게 될 것 같네요. 먼저 말씀 드리고 싶은 건, '끈기'입니다. 사실 저도 기자 일을 하면서 '어차피 글 쓰는 일인데, 나도 시나리오 한 편 써 볼까'라는 생각, 여러 번 했습니다. 실제로 시놉시스(synopsis, 영화의 핵심을 담은 짧은 글)는 여러 편 써 보기도 했고요. 하지만 머릿속에 뭔가를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을 '영화화될 수 있는' 시나리오로 완성하는 건 다른 일입니다.
[반칙왕](00)은 김대우 작가([정사](98) [스캔들](03)의 시나리오를 썼고 [음란서생](06)으로 감독 데뷔)의 한 줄 시놉시스 "은행원이 밤에 복면을 쓰고 반칙을 하는 레슬러 이야기"를 들은 김지운 감독이, 13일 만에 시나리오를 써서 완성한 영화였죠. 김지운 감독은 시나리오를 쓰면서 '주인공이 왜 필사적으로 링 위에 오르려 하는가' 부분을 가장 고민했고, 이때 우연히 본 어떤 사진 한 장에서 영감을 받아 '링 위에 올라설 때만 해방감을 가지는 인물'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링 밖의 억압적인 상황이 만들어졌고, 여기에 "인생은 '쇼'이고, 레슬링은 '현실'이다"라는 메시지와 '한국 사회의 반칙성'이라는 부분이 더해졌고요. 시놉시스가 준 영감이 완결성 있는 시나리오가 된, 매우 행복한 케이스입니다. 그리고 김지운 감독의 내공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얘기가 잠깐 다른 데로 새긴 했지만, 아무튼 '끈기'는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데 중요한 덕목인 것 같습니다. 풀리지 않는 이야기를 붙잡고 씨름하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인 거죠. [품행제로](02) [아라한-장풍대작전](04)의 시나리오를 썼고 이해준 감독과 함께 [천하장사 마돈나](06)로 감독 데뷔한 이해영 감독은 "처음에 다섯 페이지를 정도는 누구나 쓸 수 있지만, 마무리 짓는 힘은 누구에게나 있진 않다. 이야기 전체를 생각할 수 있는 체계적인 사고를 구축하는 자세와 끈기가 필요하다. 일단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을 수 있어야 하고, 어떤 일을 할 때 집요함을 보여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작가'라는 이름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혈의 누](05) [짝패](06) 등의 시나리오를 쓴 이원재 작가는 과거 어느 인터뷰에서 "적어도 5년은 투자하라"고 충고했습니다. 그 시간 동안 계속 글을 쓰고, 공모전도 내고, 영화 쪽 사람들과 만나야 하는 거죠.
[내 남자의 로맨스](04)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07)의 김선미 작가는 시나리오 작가가 갖추어야 할 자질로 '품성'과 '열정'과 '관찰력'을 꼽기도 합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어야 인간을 감동시키는 작품을 쓸 수 있고, 글 쓰는 것에 대한 강한 열정은 작품에 에너지로 스며들며, 뛰어난 관찰력은 영화의 리얼리티와 디테일의 기반이 되니까요.
세상에 대한 치열함도 매우 중요합니다.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며 반짝반짝 깨어 있어야 하고요. 어느 작가는 시나리오를 '발'과 '엉덩이'와 '머리'로 쓴다고 했습니다. 밖을 돌아다니며 세상을 접하고 그러다가 흥미로운 부분이 있으면 자료를 수집하고 직접 체험하는 '발'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 다음에야 집에 앉아 플롯을 구성하고, 마지막엔 '발'로 다니며 얻은 자료와 아이디어를 결합해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는 거고요.
임권택 감독과 [짝코](80) [만다라](81) [길소뜸](86) [티켓](86) [씨받이](87) 등 숱한 걸작들을 작업했던 송길한 작가는 "작가가 책상 앞에 앉아 상상력에만 의존해서 쓰는 것과, 그 작품에서 일어나는 상황이나 등장하는 인물을 비슷하게라도 경험해서 쓰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그런 경험에서 얻어지는 아이디어가 실제 영화에서 표현되면, 그 이미지가 지니는 생명력은 대단하다. 나는 실제로 장소를 헌팅하지 않거나 인물을 만나 취재하지 않으면 거의 작품을 쓰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송 작가의 동생이자 [넘버 3](97) [세기말](99)을 연출했던 송능한 감독은 "형님이 늘 말씀하는 것은, 영화 속의 인물들에겐 사람의 땀 냄새가 나야 하며, 그들의 발은 땅을 디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란 결국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 또, 시나리오는 머리가 아니라 발로 써야 한다는 말씀도 자주 하셨다"고 회상하기도 했고요.
시나리오 작가가 되기 위한, 조금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자면, 시나리오 작법에 대한 가이드북보다는 잘 된 시나리오를 직접 읽어 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많은 시나리오 작가들이 말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 안에는 드라마를 풀어가는 방식, 캐릭터에 대한 이해, 구체적인 테크닉들이 생생하게 숨 쉬고 있으니까요.
[비트](97) [태양은 없다](99)의 시나리오를 썼고 오랫동안 시나리오 강좌를 진행했던 심산 작가는 '영화를 베끼는 것'의 중요함을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심산 작가는 워크샵 첫 과제로 항상 '영화 베끼기'를 내주는데(주로 [8월의 크리스마스](98)와 [러브레터](95)를 텍스트로 쓴다고 하는군요), 저서인 <한국형 시나리오 쓰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나리오 베껴 쓰기는 당신을 예민하게 만든다. 그것은 스크린의 구석구석까지 당신의 촉각을 곤두서게 만든다. 이 과정을 통해서 당신은 비로소 한 편의 영화를 '발견'하게 된다. 일단 이 과정에 맛을 들이게 되면, 당신의 눈은 점점 더 커진다. 한 편의 영화를 되풀이하여 볼 때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로운 경험이다."
이러한 작업은 영화를 비평하는 것과는 매우 다른 것이겠죠. 비평이 해석이라면, 시나리오 작업을 위해 영화를 꼼꼼히 분석하는 건 이해에 가까울 겁니다. [실미도](03) [국화꽃 향기](03) [한반도](06) 등의 시나리오를 쓴 김희재 작가는 "시나리오를 공부한다면 작품을 잘게 쪼개서 분석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비평과는 다르다. 분석은 각 장면이 가진 이유를 파악하는 작업"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나리오는 몇 줄의 명대사를 짜내는 작업이 아니라, 어떤 '구조'를 창조하는 것입니다. 시나리오를 쓸 때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는 경우, 많은 작가들은 처음으로 돌아가 자신이 설계한 구조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는 건 아닌지 점검합니다. 시나리오 작법서에서 지겹게 이야기하는 '3막 구조'가, 괜히 그렇게 강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이야기를 두서없이 늘어놓았지만,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면 시나리오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거나 이게 바로 비법이라거나 하는 식의 규범은 없습니다. 어쩌면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에겐 정말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가"라는 질문일 겁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고 싶고, 그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세부적인 테크닉은 조금 어설퍼도 경험과 학습을 통해 충분히 개선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몇 권의 참고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조셉 캠벨의 신화학 서적이나,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같은 책이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시나리오 작법과 관련되진 않지만, 꽤 도움이 됩니다. 최근에 나온 <스토리 텔링의 비밀>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영화의 스토리 텔링을 조망합니다.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스무 가지 플롯>도 좋았던 것 같고요.
좀 더 직접적인 책들을 말씀드린다면, 데이비드 하워드가 쓴 두 권의 책 <시나리오 가이드>와 <시나리오 마스터>가 있습니다. 후자가 좀 더 심화된 책이죠. 많이들 읽으시는 책은 아마도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겠죠. <시나리오 성공의 법칙>도 괜찮은 편이고요. 최근에 나온 책으로는 <좋은 시나리오 나쁜 시나리오>를 재밌게 읽었습니다. 그리고 사이드 필드가 지은 <시나리오란 무엇인가>는 영원한 고전이겠죠. 그리고 이런 개론서만큼, 서점에 꽂혀 있는 무수한 시나리오 선집이나, 낱권으로 판매되는 자그마한 한국영화 시나리오들도 좋은 교재가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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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작업 시스템은 어떤가요? lemonislet
제가 과거에 썼던 기사를 요약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일반적으로 할리우드 시나리오 시스템을 '분업화'와 '단계화'라는 말로 설명하지만, 그들의 시스템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정밀합니다. 여기서 떠올려 볼 영화는 로버트 앨트먼 감독의 [플레이어](90)겠죠. 영화 속 제작자인 팀 로빈스는 말합니다. "25단어 이내로 이야기해보세요." 이것은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보편적인 태도죠. 1년에 수백 편의 시나리오를 접해야 하는 그들에게, 영화제작은 두세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는 '컨셉션'(conception, 착상)에서 시작합니다. 할리우드는 가장 간단명료하게 요약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가장 좋은 시나리오로 평가하는 거죠.
컨셉션은 작가에 의해 일단 '스토리 아웃라인'(story outline)으로 변합니다. 영화의 핵심을 전달하는 짧은 글이죠. 우리가 흔히 '시놉시스'라고 부르는 것이 바로 스토리의 아웃라인을 잡는 과정입니다. 그리고 '트리트먼트'(treatment, 가공) 단계로 넘어갑니다. 트리트먼트는 스토리 아웃라인을 몇 개의 드라마 덩어리로 나누는 것이죠. 영화가 진행되는 순서대로 주요 배역과 액션을 제시하는 것이고요. 아웃라인 단계는 "이 영화는 이런 이야기"라는 것을 제시할 뿐입니다. 트리트먼트를 거쳐야 영화의 극적 구조가 어떤 순서로 진행될 것인지 결정되는 거죠. 간단히 말하면 트리트먼트는 스토리를 플롯으로 바꾸는 작업이며, 이에 제작자는 좀 더 구체적으로 영화를 파악할 수 있게 됩니다.
트리트먼트가 끝나면 비로소 시나리오 작업으로 들어갑니다. 할리우드의 시나리오 집필은 크게 세 과정으로 나뉩니다. 첫 번째 단계는 '초고'(first draft) 혹은 '임시 시나리오'(temporary screenplay)를 만드는 과정입니다. 작가가 몇 번을 고쳐 쓰든 간에 궁극적으로 단 하나의 시나리오, 즉 '작가 최종고'(author's final)만이 남습니다. 임시 시나리오를 받은 제작자는 수정 작업에 들어갑니다. 두 번째 단계는 '최종 시나리오'(final screenplay)를 만드는 과정이죠. 작가가 바뀌기도 하고, 대사나 지문만 쓰는 작가가 합류하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수정 최종고'(revised final)가 있습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또 한 번의 수정 단계를 거치는 셈이죠. 이것은 촬영에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시나리오입니다. 그리고 촬영에 들어가서도 조금씩 고쳐집니다. 그리고 이후엔 현장 작업에 적합하도록 '마스터 신 대본'(master-scene script), '촬영 대본'(shooting script), '커팅 콘티뉴이티'(cutting continuity) 등으로 변형됩니다. 그래도 취약점이 있다고 판단되면, '시나리오 개작'(script doctoring)에 들어갑니다.